싱글로 발표되거나, 수록된 앨범에서 유독 두각을 드러내는 곡들이 많았던 올 상반기여서 따로 트랙 모음을 해봄

1. Lizzo - Juice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평키한 흥과 그루브, Lizzo의 보컬이 감칠맛을 더하는 이 곡이 유독 빛나는 것은 그만큼 강렬한 자기애의 메시지가 전달되기 때문일 것이다. 팻셰이밍과 여성혐오, 인종차별은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하지만 그런 세상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자기애라는 응원도 필요한 법이지 않을까. 그것도 기득권이 아닌 같은 처지의 동지로부터라면, 그 흔하디 흔한 "Love yourself"의 메시지와는 더 특별하고 반가운 연대로 다가오리라 믿는다.

 

2. Hot Chip - Hungry Child

Hot Chip은 여전히 흥미롭고 다채로운 밴드이다. 무엇보다도 본인들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쏟되, 그것이 너무 과하거나 나르시스트처럼 비춰지지 않게 적절히 다룰 줄 아는 미덕이 있는 밴드로, 올해 발매된 앨범도 밴드 나름대로 그어놓은 듯한 선을 잘 지키고 있다. 싱글 컷된 <Hungry Child>도 자칫하면 뻔한 하우스 뮤직처럼 들릴 법한 비트를 수려한 신디와 시크한 보컬로 멋있게 치장했다. 화룡점정은 바로 뮤직비디오. 한 커플에게 찾아온 이 음악은 관계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던지는 매개체로 작용하면서, 우리 삶에서 음악이 가진 의미를 한 번쯤 되돌아 보게 한다. 

 

3. Billie Eilish - Bury a Friend

수많은 10대들을 이끄는 아이콘 Billie Eilish의 음악과 세계관을 두고 혹자는 "중2병"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 한 단어로 일축해버리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흘려보내게 된다. 악몽과 악당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읊조리는 듯한 보컬로 서서히 긴장감을 자극하는 전개 방식을 구사하는 게 10대 여성 솔로 아티스트라면, 조금 다른 의미를 갖게 되지 않을까. 사실 호러와 스릴러에서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것은 그리 새로운 점은 아니기에 Billie의 세계관이 진부하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고통과 아픔을 대리하는 객체에서 직접 그 세계를 다스리고 이끌어가는 주체로서의 히로인에게는 10대를 넘어 전 세대에게 던지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을 것이다.

 

4. The Black Keys - Lo/Hi

다양한 장르를 접목시켜 새로운 것을 찾기 바쁜 요즘 대중음악계에서 The Black Keys는 반대로 정공법을 택한다. 그들의 음악에서는 마치 오랜 세월 딱 한 가지 메뉴만 고집하며 이름을 알리는 오랜 맛집 같은 느낌이 난다. 앨범 <Let's Rock>에서 처음으로 싱글컷된 Lo/Hi 는 그런 밴드의 정신을 그대로 녹여낸 트랙이다. 새로운 미래가 과거를 발판으로 삼는 것처럼, 이 트랙과 이 앨범도 다 죽어가는 락 씬의 "오래된 미래"로 남아있을 것 같다.

 

5. The Chemical Brothers - Eve of Destruction

기계음 섞인 목소리로 "파괴의 전야"를 알리는 이 트랙은 The Chemical Brothers가 펼칠 새로운 세계를 여는 서막 역할을 한다. "그래서 뭘 파괴한다는 거야?"라는 질문이 절로 나올 정도로 흥미로운 요소들이 가득한데, 뭐가 됐든 잠시 머리를 비우고 흥겹게 춤을 출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 댄스 음악의 조건을 충족하고도 남는다. 난데 없이 튀어 나오는 일본어 랩이 조금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8-90년대 일본 특촬물의 영향을 받은 듯한 뮤직비디오를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되기도. 가장 트렌디한 뮤지션 중 하나인 AURORA의 등장은 또 다른 즐거움 중 하나.

 

6. 이달의 소녀(LOOΠΔ) - Butterfly

케이팝 팬덤이 어디까지 팬덤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려 하는지는 항상 의문이 들지만 이달의 소녀의 Butterfly는 케이팝 씬에서 만난 가장 훌륭한 피드백이다. 트위터와 SNS에서 팬덤이 끊임없이 제기하던 이슈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 것 같이, 이 몽환적인 트랙은 팬들이 추구하는 어떤 이상향을 구현하려 한다. 상승 기류를 그려낸듯한 메인 멜로디가 따라가는 길은 뮤직비디오가 그려낸 것과 같은 유토피아일지, 아니면 잠시뿐일 전략에 불과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이 시도에 박수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효과를 유도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7. サカナクション(sakanaction) - 忘れられないの (잊을 수 없어)

전세계를 휩쓴 일본 시티팝 열풍에 본토 밴드들도 기꺼이 동참하는 요즘, 사카낙션이 내놓은 답은 단순하다. 그런 느낌을 낼 수 있는 리듬과 사운드를 찾아서 그저 즐겁게 녹여내는 것. 오랜만에 발매하는 싱글인 만큼 더 새로운 것을 바라는 팬들도 있었겠지만 이런 명쾌함과 흥만큼 사카낙션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아니, 다른 건 다 차치하더라도 이 곡의 베이스 라인을 사랑하지 않을 리스너가 있을까. 베이시스트 쿠사카리 아미의 여름 햇살을 만끽하는 베이스 리프를 이 여름이 가기 전에 꼭 즐겨보시길.

 

8. Yonyon, 一十三十一(Hitomitoi) - Overflow

Yonyon은 한국과 일본의 라이징 스타들과 함께 협업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자신만의 색깔을 다양한 방면으로 실험하고 있는 아티스트로, 이미 SIRUP이나 무카이 타이치(井太一)와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그 이름을 알려왔다. 히토미토이와 함께한 트랙 <Overflow>는 그 중 단연 독보적인 매력을 지녔는데, 한국어/일어/영어 3개국어로 쓰인 가사가 주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깔끔한 하우스풍 비트로 빚어낸 상쾌한 트랙이다. 계속 되는 싱글 발매로 팬들의 기대감을 충족함과 동시에 호기심도 커지게 하는 이 아티스트의 다음은 또 어떠할지, 항상 그 다음을 기대하게 하는 아티스트를 만나서 반갑다.

 

9. 欅坂46(keyakizaka46) - 黒い羊(검은 양) 

"웃지 않는 아이돌"로 불리며 흔히 생각하는 일본 여성 아이돌의 전형을 깨는 케야키자카46의 올해 첫 싱글은, 조금 진부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충격 그 자체이다. 끊임없이 사회와 인간관계에 물음을 던지고 도전하는 곡으로 주목받던 그들은 <검은 양>에서 그동안의 행보를 회고하는 듯한 화자를 내세우며 이제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화자는 "나만 없어지면 되는 거지"( 僕だけがいなくなればいいんだ), "모두 내 탓이야"(全部 僕のせいだ) 라며 자신이 느낀 무력감과 고통, 슬픔을 가감없이 드러내지만, 그런 체념을 후반부에서는 "하얀 양 따위는 절대 되고 싶지 않아"(白い羊なんて僕は絶対になりたくないんだ)라며 승화시킴으로서 변함없이 갈등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다시금 불태운다. 마치 뮤지컬의 클라이막스를 담아낸 듯한 영웅적인 내러티브가 피아노와 스트링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약 5분 간의 러닝 타임에 극적으로 녹아들어있다. 

한일을 막론하고 아이돌 계에서, 사회 비판적으로 정의를 말하는 메시지는 주로 남성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지곤 했다. 약자에 대한 공감 없이 갈등을 뚫고 전진하라고만 외치는 남성의 목소리가 현재 시점에서 과연 얼마나 유효할까? <검은 양>은 그런 진부함에 대한 비판이자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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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 발매작 중 좋아했던 앨범들을 백업.

 

1. Sharon Van Etten - Remind Me Tomorrow

Sharon Van Etten의 음악은 마치 테라리움 같다. 그의 음악에서 우리는 행복했던 과거와 후회의 순간, 다가올 미래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데, 동시에 우리를 둘러싼 불안정하고 예측할 수 없는 세계에서 어떤 안정감을 느끼기도 한다. <Comeback Kid>, <Seventeen>의 폭발하는 사운드와 <No One's Easy to Love>, <Jupiter 4>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오가는 가운데, 마지막 트랙을 지나고 나면 귓가에 남아있는 온기가 내 자신을 다독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위안이 있어서 우리는 자신의 세계를 온전히 지키고, 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 아닐까.

 

2. Lizzo - Cuz I Love You

아마도 2019년 발매작 중 가장 활기찬 에너지로 가득한 앨범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모두의 어깨를 절로 들썩이게 했던 레트로 펑키 사운드 <Juice>, Missy Elliot과의 눈부신 콜라보가 인상적인 <Tempo>, 가창력을 제대로 뽐낸 <Crybaby>까지 기분좋게 들을 수 있는 곡들로 가득한 이 앨범은 우리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던 작은 용기를 끌어올린다. 직설적인 메시지로 많은 여성들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아티스트인만큼, 그 목소리가 더 많은 이에게 가닿기를 바란다. 

 

3. Nilüfer Yanya - Miss Universe

주목받는 신인에게 흔히 붙는 "당돌한", "겁없는"이라는 수식어는 이제 진부해진지 오래지만, Nilüfer Yanya라면 전혀 이야기가 달라진다. 첫 정규앨범을 준비하며 이전에 발매된 EP에서도 전혀 공개되지 않았던 신곡들을 무려 17곡이나 담아낸다는 것은 신인 아티스트가 여간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다. Miss Universe는 그런 과감한 결정을 밀어붙인 원동력이었을 타오르는 열정이 느껴지는 뜨거운 앨범이다. 특히 <In Your Head>를 듣지 않고 2019년을 넘겨버린다면 엄청난 후회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4. The Comet is Coming - Trust in the Lifeforce of the Deep Mystery

첫 앨범 Channel the Spirits로 머큐리 프라이즈 후보에 오르면서 주목받기 시작한 The Comet is Coming은 데뷔작의 성공이 절대 운에 기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두 번째 앨범에서 증명한다. 바쁘게 쪼개지는 비트를 자유로이 휘젓는 색소폰은 전작에 비해 재즈의 색채를 더욱 진하게 드러내며, 동시에 로큰롤보다 짜릿하고 묵직한 일격을 날린다. 드럼과 색소폰의 대결에 절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Timewave Zero>, 일렉트로니카적 요소가 가장 진하게 녹아들어간 <Summon the Fire> 등, SF영화의 장면들을 음악으로 구현한 듯한 이들의 대장정을 계속해서 따라가고 싶다.

 

5. Solange - When I Get Home

Solange의 주술은 이번 앨범에서도 이어진다. A Seat at the Table에서 선보인 바 있는 나른한 사운드와 강렬한 메시지의 조합은 이번 작품을 통해 한 차례 더 승화된다. 그 사운드는 마치 향수처럼, 희미해보여도 어느새 공간을 가득 메워 마음대로 빠져나갈 수 없도록 우리의 귀를 사로잡는다. <Almeda>에서 "Brown", "Black"이란 단어를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은 단순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주술처럼 들리기도 한다. 부드러움 아래에 감춰낸 날카로움을 서서히 자각하게 하는 것, 그것이 Solange만이 가진 세상에 맞서는 무기이자 그가 고발하고 싶어하는 이 사회의 모순일 것이다. 

 

6. Beyoncé - Homecoming: The Live Album

전세계를 들썩이게 했던 바로 그 퍼포먼스가 다시 재현된다. 동명의 라이브 필름을 함께 공개하며, Beyoncé는 이 "재현"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더 넓게 확장시킨다. 특정한 컨셉 아래에서 재조합된 디스코그라피, 그것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무대, 그 퍼포먼스를 준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플래시백, 이 모든 것을 현재 시점에서 회상하는 Beyoncé의 나레이션과 목소리.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울린 Homecoming은 과거에 대한 기록에 머물지 않는다. Homecoming은 가수 Beyoncé가 흑인 기혼 여성인 Beyoncé로서 사회에 던지는 외침을 새롭게 구현해낸 결과물이며, 이제는 그 목소리에 우리가 움직이기 시작할 차례다.

 

7. Better Oblivion Community Center - Better Oblivion Community Center

2018년에 boygenius가 있었다면 2019년에는 Better Oblivion Community Center가 있다. Better Oblivion Community Center는 boygenius를 통해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의 이상을 구현해낸 Phoebe Bridgers가 준비한 새로운 프로젝트로, 본인의 주장르인 포크와 어쿠스틱을 보다 심도있게 다룬다. 물흐르는 듯이 자연스레 흘러가는 어쿠스틱 기타 사운드 위로 내려앉는 하모니만큼 듣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건 또 없을 것이다. 왠지 모를 걱정과 불안감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에는 이 앨범을 스스로에게 처방하자.

 

8. あいみょん(아이묭) - 瞬間的シックスセンス(순간적 식스센스)

일본의 스트리밍 채널은 물론, 온/오프라인 차트까지 점령한 아이묭(あいみょん)의 저력이 가감없이 녹아들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강하게 파고들어오는 <満月の夜なら>(보름달의 밤이라면)을 시작으로 건조하면서도 가슴 한 켠에 아련함을 남기는 메가히트 싱글 <マリーゴールド(마리골드)>와 같이 이미 익숙한 트랙들, 그리고 그 사이로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ひかりもの>(빛나는 것)과 같은 신곡들이 단숨에 청자를 사로잡는다. 진솔한 가사와 감칠맛 나는 멜로디, 자신만의 스타일로 무장한 여성 솔로 아티스트의 등장으로 일본 대중음악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닐지, 앞으로의 행보가 매우 기대된다. 

 

9. 백예린 - Our Love is Great

첫 EP인 FRANK 이후, 백예린의 음악을 하나의 앨범 단위로 들을 수 있을 때까지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4년 동안 우리는 사운드클라우드와 타 아티스트와의 콜라보레이션, 공연장에서 들려주는 미발표곡과 유튜브에 올라온 팬들의 영상을 전전하며 갈증 속에서 이따금 단비를 맞곤 했다. Our Love is Great는 그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청량한 오아시스였다. 섬세하고 예민하지만 결코 약하지는 않은, 백예린이 아닌 그 누구도 재현할 수 없는 사운드로 가득한 이 앨범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딱 두 가지이다. 하나는 디지털 음원으로만 유통된다는 것, 또 하나는 EP라는 것. 이 아티스트의 저력을 왜 JYP와 스튜디오 제이만 모르는 걸까.

 

10. Red Velvet - The ReVe Festival Day 1

 

댄스와 전자음을 기반으로 한 밝고 에너제틱한 Red 컨셉과 R&B에 뿌리를 둔 우아하고 차분한 Velvet 컨셉은 언제부턴가 서로 섞여 새로운 색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상승과 하강 그리고 긴장과 이완을 곡예하듯 넘나드는 묘한 매력을 과시하던 레드벨벳이 이제는 아예 테마파크와 페스티벌을 테마로 연작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Zimzalabim>이라는 청각적 롤러코스터를 타는 3분 동안은 그들의 5년 간의 커리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경험을 선사함과 동시에, <Sunny Side Up!>부터 이어지는 새로운 세계를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 다양한 어트랙션이 포진한 테마파크를 그렇게 쭉 돌아본 끝에 마주한 <LP>의 종결부에 다다르면,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물음표 하나를 그려볼 수 있다. Day 2 와 파이널에서 어떤 곡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짜릿한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란 사실은 확실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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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부터 6월까지 발매된 앨범 중 주목할만한 작품들을 골라보았습니다. 순서는 순위가 아닙니다.


1. Superorganism - Superorganism

병치될 수 있을 거라 생각치 못했던 요소들은 Superorganism의 곡 속에서 그 밴드명만으로도 개연성을 가지게 된다.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한국어 가사, 과일을 베어먹거나 음료를 마시는 일상 속의 소리, 읊조리듯 진행되다 갑자기 왜곡된 보컬은 충격적이면서도 신선한 기쁨을 선사한다. 동시에 이 다음에는 또 어떤 결과물을 들고 나올지, 더 먼 미래를 기대하게 만드는 이 묘한 앨범에 박수를 보내본다.


2. U.S Girls - In a Poem Unlimited

공명하는 보컬과 악기들로 우리를 자신만의 세계로 이끄는 U.S. Girls의 신보는, 그런 미적인 차원의 매력을 넘어선 메시지로 사람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전개에 담긴 분노와 비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에 마음이 저절로 반응하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조금 더 볼륨을 높이고, 가사를 하나씩 읽어내려가며 함께 들어보자.


3. Janelle Monae - Dirty Computer

<Electric Lady> 이후 오랜만에 찾아온 Janelle Monae의 신보에서는 그 5년의 갭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5년간 그가 얼마나 더 단단해지고 강해졌는지 충분히 체감할 수 있다. Janelle Monae 특유의 아프로퓨쳐리즘(afrofuturism)에 녹여낸 미국의 바이섹슈얼 흑인 여성 페미니스트로서 살아온 그는 가상 현실을 배경으로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며, 동시에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며 큰 울림을 전한다. 그가 건낸 이 극적인 성명서에 누구든지 흔쾌히 서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4. Kacey Musgraves - Golden Hour

미국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이 컨트리라는 장르를 미국인이 아닌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 같다. 조금은 고리타분하거나 재미없거나 보수적일 거란 생각을 으레 갖기 마련이라 그 진입장벽도 다소 높아보이는 경향도 있다. Kacey Musgraves의 새 앨범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잠시 모든 걸 잊고, 왜 진작 이 장르를 가까이 하지 않았지? 라는 질문을 절로 던지게 하는, 금빛으로 빛나는 멜로디와 그루브에 잠시 몸을 맡겨보자. 


5. Kamasi Washington - Heaven and Earth

Kamasi Washington은 언제나 압도적인 스케일의 결과물을 내놓는다. 그렇지만 그게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이유는, 그 압도한다는 의미가 청자를 짓누르는 느낌이 아니라그 세계에서 충분히 호흡할 수 있는 여유를 남겨둔다는 데 있는 것 같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것처럼 자유로이 오가는 색소폰과 재즈 사운드라면 2시간이고 3시간이고 전혀 충분하다고 느낄 수 없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번 첫 내한 단독 공연, 90분의 러닝타임은 너무 짧은 것 아닐까?


6. SOPHIE - Oil of Every Pearl's Un-insides

올해가 지나도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의 강렬한 충격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방황하는 이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It's Okay to Cry>의 꿈꾸는 듯한 멜로디 너머로 금속성의 날카로운 트랙들이 이어지고, 전혀 기대하지 않은 앰비언트 사운드를 지나고 나면 환희로 벅차오르는 <Immaterial>의 중독적인 비트에 마음을 빼앗겨버린다. MTF인 SOPHIE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느껴지기도 해서, 이 앨범의 모든 것이 유독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7. Father John Misty - God's Favorite Customer

솔직히 말하자면, 이 앨범에는 같이 꼽힌 다른 앨범들만큼 크게 자극적이거나 강렬한한 방이 있진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1번 트랙부터 끝까지 멈추지 않고 들을 수 있는 특유의 감칠맛을 거부할 수가 없다. 가만히 앉아서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트랙이 끝난지 오래다. 뭔가 거창하고 마땅한 이유를 댈 수 없다는 사실이 이 앨범을 더욱 찾게 만드는 것 같다.


8. Cero - Poly Life Multi Soul

언제 어디서 어떤 비트와 멜로디가 튀어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긴박감이 마치 여름날의 어드벤쳐와도 같다. 흔히 음원이나 앨범을 들을 때면 이런 스튜디오 버전의 음악이란 마치 박제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Cero의 사운드는 그 안에서도 충분히 역동적으로 헤엄치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라이브를 꼭 챙겨보고 싶은 밴드.


9. Florence + the Machine - High as Hope

2009년 첫 앨범을 발매했을 때부터 Florence + the Machine은 그 어떤 뮤지션보다도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약 10년이 지난 지금, 그 때의 그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고 다시금 확언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앨범에서 처음으로 싱글컷된 <Hunger>를 들을 때부터, 자신의 과거와 아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숭고함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극적인 전개가 두드러지는 10곡의 서사시를 감상해보자.


10. Sleeq - Life Minus F is Lie

이번 앨범이 전작보다 더 철학적인 경향이 있다고 슬릭 본인의 트윗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지 이전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동시에 그가 꿈꾸는 이상에 대한 열망과 사랑으로 꽉 채워진 앨범이기도 하다. 세상은 페미니스트 여성 랩퍼인 그를 분노케 하지만, 그런 세상을 아직 포기하지 않는 굳은 의지가 10곡의 노래들에서 잔뜩 묻어난다. 함께 저항하는 입장에서 숨고르기를 할 수 있어 고맙고 위안이 되었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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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한 해, 귀를 즐겁게 해주었던 앨범들을 추려봅니다.  순서는 순위가 아닙니다. 


1. St. Vincent - MASSEDUCTION

극적인 연작무대를 보는 듯한 구성의 색깔있는 앨범이다. 수준급의 완급조절과 전작보다 풍부해진 사운드의 레이어는 좌중을 사로잡는 그녀의 강렬한 카리스마와도 닮아있어, St. Vincent의 오랜 팬이라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조섞인 능청스러움을 밝은 색채로 묘사한 <Pills>, 화려함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서정성을 노래하는 <New York>과 같은 싱글 컷 트랙과 더불어, 선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표제곡 <Masseduction>과 보컬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한 <Young Lover>까지, 다양한 장르와 분위기를 넘나드는 그녀의 1인극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2. Moses Sumney - Aromanticism 

어떤 장르보다도 로맨틱한 감성과 잘 연결되는 R&B를 빌어 Moses Sumney는 로맨스의 이면과 고독을 노래한다. 그러나 이는 전혀 쓸쓸하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마치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감싸안아주는 듯한 보컬과 편곡에서는 따스함이 묻어나기도 한다. 관계맺기에 대한 회의를 노래하는 <Don't Bother Calling>와 이카루스의 신화를 재해석한 <Plastic>이 우리에게 포근하게 내려앉는 트랙이라면, 직설적인 사운드로 고독을 외치는 <Lonely World>와 계속해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 질문하는 <Doomed>는 다소 철학적인 관점으로 우리를 이끈다. 사랑과 관계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반문.


3. Lorde - Melodrama

데뷔앨범 <Pure Heroine>에서부터 Lorde는 자신 그리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주변 환경에 대한 깊이있는 고찰을 녹여내는 아티스트였다. 그리고 <Melodrama>를 통해 이제는 조금 더 내면 깊숙한 곳에 있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한다. 본인의 실제 연애 및 이별에 기반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경험들은 Lorde가 이 세대를 관통할 수 있는 통찰력을 발견하게 된 계기도 함께 주었던 것 같다. 첫번째 트랙 <Green Light>는 이처럼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그녀의 음악을 선언하고, 마지막 트랙 <Perfect Places>는 그러한 여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한 번 더 선언한다. 이렇게 Lorde는 내일이 더 기대되는 아티스트임을 다시 또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4. The National - Sleep Well Beast

The National이 또 연타석 홈런을 때려냈다. 앨범을 거듭할 수록 The National은 우리를 깊고 어두운 숲속으로 인도하는데, 그 어둠은 점점 짙어짐에도 전혀 무섭거나 두려운 존재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이번 앨범에서 밴드는 실패한 관계와 불안정한 사회를 주제로 다루고 있지만, 그것에 절망하기보다는 이를 새로운 미래를 향한 도약으로 바꾸고자 하는 의지를 내비친다. 앨범의 제목이기도 한 마지막 트랙인 <Sleep Well Beast>가 동면을 노래하는 것처럼, 그 다음 세대를 기약하기에 절망과 종말로만 읽히지 않는 그들의 메시지가 유난히 가슴깊게 남는다.


5. SZA - Ctrl

올해 R&B는 물론 전 장르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신인 중 하나였던 SZA는 이 앨범으로 R&B 장르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벨벳처럼 부드럽고 안정적인 목소리로 자신의 불안감과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마치 이를 즐기는 듯한 가창력과 기교가 모든 트랙의 전반에 나선다. 기타 리프에만 기댄 A파트가 매력적인 첫 트랙 <Supermodel>과 팝 디스코적인 요소를 차용한 <Prom>, 피쳐링으로 참여한 Kendrick Lamar에 전혀 뒤지지 않는 파워를 보여주는 <Doves in the Wind>등, SZA의 잠재력에 더 큰 기대를 품게 하는 곡들로 가득한 데뷔앨범이다. 


6. Daniel Caesar - Freudian

위에서 언급한 SZA의 <Ctrl>과 함께 올 한 해 R&B를 이끈 또 한 장의 앨범. Daniel Caesar는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R&B의 문법을 충실하게 따르되 장르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을 매우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에게 음악이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면서, 사랑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안정을 찾는 여정을 그려낼 수 있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Looses>에서 <We Find Love>로 자연스레 넘어가는 장치라든가, 많은 사랑을 받았던 <Best Part>와 같은 타 뮤지션과의 협업 등, 들으면 들을 수록 감상 포인트가 많아지는 흥미로운 수작이다. 


7. Bjork - Utopia

치유를 노래하던 전작 <Vulnicura>에 이은 <Utopia>를 통해 Bjork은 또 자신만의 세계를 대중 앞에 공개했다. 이 세계로의 초대장을 전달하는 첫 트랙 <Arisen My Senses>에 숨겨진 마력처럼, 수록된 곡들은 앨범 타이틀이 뜻하는 '이상향'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과는 다르게 조금은 기이하고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이미지를 그려내지만, 그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역동적인 멜로디와 보컬에서 우리는 새로운 생동감을 경험할 수 있다. 첫번째 싱글로 공개된 <The Gate>를 발표할 당시 보다 넓은 의미의 '사랑'을 노래하고 싶다고 밝혔던 것과 같이, 모든 것을 따스하게 감싸안는 힘이 트랙 곳곳에 숨쉬고 있다. 


8. The XX - I See You

멤버들 간의 안정된 관계가 느껴져서 듣는 사람을 절로 흐뭇하게 만드는 앨범들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로 The XX의 이번 앨범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전작 <Coexist> 발매 이후 각자의 시간을 가졌던 멤버들에게는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더욱 조화롭고 편안한 분위기의 곡들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On Hold>와 <I Dare You>처럼 절로 리듬을 타게 하는 트랙과 함께, 차분하고 강렬한 사운드가 돋보이는 <Violent Noise>, 밴드의 시그니처와 같은 꿈 꾸는 듯한 고요함이 돋보이는 <Replica>등, 오랫동안 기다려온 팬들의 기대감을 웃도는 결과물에 2017년을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다. 


9. 새소년 - 여름깃

하늘을 나는 새 또는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뜻하는 이중적인 밴드명인 '새소년'의 의미를 잘 담아낸 데뷔 EP. 약간 언니네 이발관이 연상되기도 하는 첫트랙 <나는 새롭게 떠오른 외로움을 봐요>에서 맛본 씁쓸한 감정은 <긴 꿈>에서 이내 낭만을 머금은 것으로 다시 태어나고, <파도>에서 역동적인 파워를 과시하다 <새소년>에서 다시 다음을 기약한다. 정규 앨범이 아닌 EP임에도 워낙 다양한 감정들을 넘나드는 곡들로 채워져 있어 전혀 아쉬움이 느껴지지 않음과 동시에, 이들의 다음 결과물은 또 얼마나 찬란할지 기대감을 품게 된다. 


10. 전자양 - 던전

총 4개의 싱글로 나누어 발매되었던 곡들이 하나의 정규 앨범으로 묶였다. 싱글 발매 순으로 이어지지 않는 트랙 배치로 인해, 저마다의 개성으로 살아 숨쉬던 곡들이 새로운 맥락에서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전자양의 곡들은 즐거움과 흥으로 가득차있다가도 그 이면의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는 특이함을 갖고 있는데, '던전'이라는 타이틀이 바로 그런 매력을 함축적으로 묘사한다. <던전 1>과 <던전 2>에서 느껴지는 그런 포인트에 더불어, <사스콰치>와 <어두컹컹!>과 같이 전자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기꺼이 반길만한 곡들이 쉬지 않고 이어지는 앨범이다. 


11. Red Velvet - Perfect Velvet

케이팝 시장에서 걸그룹의 이미지는 주로 소녀의 대표적인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에서 그치거나 안전한 시도에 머물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레드벨벳은 이 앨범을 통해 거기서 과감하게 한 걸음을 앞서 나간다. 사랑을 유희처럼 즐기고 급기야 무기를 들고 나서는 타이틀곡 <Peek-A-Boo>의 서늘한 이미지가 워낙 강렬하지만, 사실 이 앨범은 그런 <Peek-A-Boo>를 뒷받침하는 수록곡들이 있어 더 빛나고 있다. 벨벳이란 타이틀에 걸맞는 고급스런 R&B인 <Kingdom Come>, 레트로한 감성의 여유가 느껴지는 <봐>와 "줄도 안 맞추고""제멋대로"인 트랙 <Attaboy>가 있어 이들의 행보는 더 큰 설득력을 발휘한다. 잘 기획된 컨셉의 정규 앨범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즐거움을 뽑아낸 모범 사례로 꼽고 싶다. 


12. DAY6 - Sunrise / Moonrise

하루에도 수 많은 곡과 아티스트가 쏟아져 나오는 케이팝 시장에서 1년 간의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은 어쩌면 시대를 역행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꾸준한 퀄리티를 유지하고 강한 설득력을 발휘하는 곡들로 전개된다면, 이것은 오히려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Every Day6> 프로젝트가 증명해냈다. 상반기의 <Sunrise>는 새로운 도전과 다양한 장르들로 가득하고, 하반기의 <Moonrise>는 밴드의 트레이드 마크인 감성적인 트랙과 가사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곡들로 채워져 있어, 이 밴드가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을지 기쁜 마음으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한다.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깨닫게 해주는 알찬 결과물이다.


13. Kamasi Washington - Harmony of Difference

지난 2015년, 스케일과 구성면에서 모두 압도적인 앨범 <The Epic>으로 극찬을 받았던 Kamasi Washington은 이번 EP를 통해 또 다른 매력을 과시한다. 단 6곡이 수록된 이번 EP에는 트랙 수 이상으로 그만의 기교와 풍부한 사운드가 흘러넘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재즈라고 하면 타 장르에 비해 더 자유롭고 즉흥적이며 변곡점이 많다는 인상을 갖고 있는데, 그런 화려함 속에서 안정감을 놓치지 않는 매력을 그의 음악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앨범에서 유일하게 보컬이 얹어진 마지막 곡 <Truth>는 13분이나 되는 러닝타임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그의 모든 것을 담아냈으니 반드시 체크할 것.


14. Tinariwen - Elwan 

Tinariwen의 앨범은 그 퀄리티도 굉장하지만, 밴드의 출신과 장르를 고려했을 때 음악 외적인 부분으로 더 큰 질문을 던지는 앨범이다. 현대 대중 음악의 근간이 되는 블루스의 고장임에도 우리는 왜 그들의 음악에 좀 더 귀기울이지 못했는지, 그리고 그런 문화적 특성을 마치 하나의 토큰처럼 소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그 국가적 특성으로 인해 "월드 뮤직"이라는 장르로 통칭되는 것이 정말 옳을지, 이 산업에서 한 번쯤 생각해봐야하는 지점들을 모두 건드리게 된다. 이는 그만큼 좋은 앨범이라는 사실을 방증하기도 하지만, 영미권 이외의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음악을 소비하는 올바른 자세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때라는 경각심을 일깨우기도 한다. 


15. The War on Drugs - A Deeper Understanding

제목 그대로 The War on Drugs의 음악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돕는 앨범이다. 이들의 음악은 항상 어딘가를 향해 쭉 달려나가는 사운드로 가득차있는데, 이번 앨범에서도 그런 뚜렷한 향상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앞만 보고 달려나가기보다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듯한 향수가 묻어나기도 해서, 청자로 하여금 굉장히 다양한 심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바로 이들의 음악이 가진 포인트. 그런 면모가 정말 잘 드러나는 <Holding On>의 뮤직비디오와 함께 감상한다면, 이 밴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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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사이행성에서 모집한 《어려운 여자들》 서평단에 선정되어 이 리뷰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서평단에게는 총 21편의 단편 중 8편만 실려있는 발췌본이 제공되었으며, 8편의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언니가 가면 나도 갈래>, <물, 그 엄청난 무게>, <어려운 여자들>, <어떻게>, <유리심장을 위한 레퀴엠>, <나쁜 신부>, <나는 칼이다>, <이방의 신들>


폴 버호벤의 <엘르>는 주인공 미셸을 둘러싼 사건들, 그리고 그녀의 비밀과 심리를 통해 한치앞도 예측할 수 없는 국면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영화다. 살인자의 딸, 강간 피해자, 게임회사의 CEO 등, 미셸을 설명할 수 있는 문구들은 다양하지만, 이 중 어느 것도 미셸을 설명하지 못한다. 마치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는 것에 이 영화의 제작 의도가 있는 것 같이, 미셸은 관객이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선택지를 택하며 극을 이끌기 때문이다. 당연하고도 합리적이라 믿었던 것들이 하나 둘씩 어긋나면서, 관객들은 기존의 고정관념, 특히 여성들에게 가해졌던 이미지들에서 벗어나 미셸이라는 개인의 심리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영화를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장치로 작동한다. 


우리는 이해하는 데 한계를 느끼거나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을 때 흔히 "어렵다"라고 말한다. 이 말이 전제하는 것은 복잡함으로, 보다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심도있는 고찰이 필요하다.  록산 게이가 자신의 단편소설집에 《어려운 여자들》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 인물을 다루는 일반적인 소설들이 그러하듯이,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도 성적인 착취와 결혼 생활에 대한 회의감, 가족과의 갈등과 같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배경에 놓여있다. 그러나 <엘르>의 미셸과 같이, 이 여성들은 그러한 경험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이들은 클리셰를 벗어나 각자의 삶의 방식에 따라 세상과 마주한다. 그것은 형제와의 유대관계, 동성 연인의 믿음,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공격성의 발현 등, 일원화될 수 없는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결국 독자들이 그들을 "어렵다"라고 평가하게 되는 주된 원인은 인물들의 생동감과 "사람됨"에 존재한다. 우리는 인간 관계에서 항상 상대방의 성격과 특징을 정의하려 노력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들도 역시 사람이기에, 때로는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고, 예상 밖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며, 언제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선택만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당연한 이야기가 유독 여성들에게는 좀처럼 적용되지 못했다. 여성을 옭아매는 사회적인 시선(이라 쓰지만 주로 억압에 해당할 것이다)은 그들에게 다양한 모습을 허용하지 않았다. 외모부터 시작해서 옷차림, 행동 양식 등, "여성성"의 이름으로 여성들은 끊임없이 규제됨과 동시에 (성적) 대상화되고, 여성에게 주어진 선택지를 하나씩 지워나갔다. 하지만 게이의 글에서 여성은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어려운 여자들》 속 여성들은 더이상 고정된 이미지가 아닌, 입체적인 인간으로서 살아 움직이며, 여성들은 비로소 "어려운" 존재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페미니즘이란 여성이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는 급진적인 개념이다"(Feminism is radical notion that women are people)이라는 유명한 문구가 말하듯, 그동안 문학을 포함한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여성은 인간(아마도 남성)과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객체화의 굴레 속에서, 여성은 지배권력이 원하는 모습대로 가공되었고, 거기서 벗어나는 여성들은 사회에서도 격리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여성은 2차원의 이미지처럼 납작하게 묘사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여성도 3차원의 세상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3차원의 입체성을 지닌 존재들이다. 《어려운 여자들》 은 그러한 사실을 대중에 환기하는 매우 유의미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어려운 여자들》이 꿈꾸던 세상은 어쩌면 "여성"이 "사람"이라는 의미로 통용되는 이상향일지도 모른다. 



2017년도 이제 절반이 지나갔으니, 지금까지 들었던 앨범 중 마음에 들었던 것들을 모아볼 시간


1. The XX - I See You

Jamie XX의 솔로 앨범을 들으면서 가장 크게 품었던 의문은, 앞으로 The XX는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였다. Jamie XX가 자신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한껏 자랑했던 솔로 활동이었기에, 밴드 The XX라는 그릇에 무엇을 담아낼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기다렸던 이번 신보는 바로 그 질문에 어느 정도 답을 해준 것 같다. Say Something Loving과 Replica와 같이, The XX가 사랑받을 수 있었던 고요한 트랙에 더해 Dangerous나 On Hold 등 Jamie XX의 솔로에서 느낄 수 있던 위트있는 곡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밴드의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까지 상상해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구매 인증샷을 찍으려면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의 반사된 이미지를 담아낼 수 밖에 없는, 거울과도 같은 앨범 커버를 차용한 것도 아마 그런 의미일지 모른다. 


2. Tennis - Yours Conditionally

Tennis는 어쩌면 지구상에서 가장 케미가 좋은 부부이지 않을까. 전작에 비해 한껏 더 릴렉싱한 분위기로 돌아온 이번 앨범은 자칫하면 루즈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아름답고 정교하게 쌓아올린 사운드와 보컬로 마무리해 재미를 안겨준다. 듣고 있으면 꼭 바이닐로 감상해야 할 것 같은 빈티지한 첫번째 곡 In the Morning I'll Be Better와 더불어 Modern Woman의 뮤직비디오도 꼭 체크할 것.


3. Tinariwen - Elwan

말리 출신의 트와레그족으로 구성된 Tinariwen의 신보는, 그 이름이 '사막'이라는 뜻을 깨닫기도 전에 그 사막의 기후를 느낄 수 있는 블루스를 선보인다. 이처럼 음악적인 성취도 매우 빛나지만, 이 팀의 의의는 이런 월드뮤직을 감상하는 청자들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것에 있다. 이 앨범이 담아낸 그들의 문화와 정체성을 우리는 그저 멋지고 힙한 음악으로만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들의 음악이 왜 마음에 드는지 제대로 설명하려면 어쩌면 더 많은 고민과 공부가 필요할지 모른다. 


4. ANOHNI - Paradise

전작 Hopelessness의 연장선에 놓이는 듯한 이번 EP는 어찌보면 리패키지 앨범과 같은 인상을 주지만, 7개의 트랙을 따라가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전 앨범의 각 트랙들이 구체적인 아젠다를 제시하는 공론장에 가까웠다면 이번 앨범은 폭발하는 분노와 감정을 날 것처럼 담아내지만, 그럼에도 이 세계에 대해 애정을 아낌없이 표현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 트랙인 I Never Stopped Loving You를 사회에 대해 염려하는 메시지를 보낸 팬들에게 이메일로 개별 전달했던 프로모션을 진행했던 것은, 그가 "희망이 없는" 사회 속에서 "낙원"에 대한 가능성을 놓지 않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하다. 


5. Spoon - Hot Thoughts

굉장히 공을 들여 복잡하게 소리들을 결합하는 앨범들도 좋지만, 그런 티가 별로 나지 않으면서도 감탄을 자아내는 음악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감동이 있는데, 그 예시로 Spoon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동명의 리드 트랙인 Hot Thoughts의 전주가 재생될 때부터 우리는 이 앨범이 Spoon이 만들어낸 또 다른 깊은 세계로 초대된 듯한 느낌을 받는데, 그 감동이 극대화되는 지점은 다소 아이러니하게도 Do I Have to Talk You into It?에서 무심코 건네는 듯한 보컬에 자리잡고 있다. 재치있으면서도 긴장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는 Spoon의 관록에 한 번 더 감탄하게 된다. 


6. Phoenix - Ti Amo

시절이 하수상하지만 계속해서 싸우다보면 지치기 마련. Phoenix의 Ti Amo는 바로 그런 시기에 들으면 좋을 따스한 위로와 같은 앨범이다.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사랑과 꿈을 노래하는 Phoenix의 음악은 잠시 현실에서 눈을 돌려 우리가 원하고자 했던 것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되물을 수 있는 휴식을 선사한다. 그 중에서도 Fior Di Latte - Lovelife - Goodbye Soleil로 이어지는 구성은 아련한 향수까지 자극하는데, 표제곡인 Ti Amo보다도 더 이 앨범의 정서를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7. Lorde - Melodrama

Pure Heroine을 통해 새로운 팝 디바 상을 제시했던 Lorde가 올해는 보다 개인적이고 극적인 영역으로 표현력을 확장했다. Melodrama라는 제목에 걸맞게, 매 트랙을 넘길 때마다 우리는 그의 요동치는 감정의 궤적을 따라가는 체험을 한다. 자신있게 포문을 연 댄스 튠 Green Light을 시작으로 내면의 자아와 마주하는 발라드 Liability의 감동을 지나, Supercut을 통해 지난 기억의 필름을 되감으면 어느새 Perfect Places에 안착하게 된다. 그러나 마치 배반이라도 하는 듯이 "What the fuck are perfect places anyway?"라고 되묻는 것은 그의 여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선언함과 동시에 더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이것이 바로 대중이 Lorde의 음악을 사랑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8. Feist - Pleasure

너무나 오랜만에 돌아온 앨범이기에 어느 정도 팔이 안으로 굽긴 하지만 그런 팬심(?)을 제외하고도 명반에 올려놓을 수 있는 작품이다. Feist를 대중에게 알렸던 곡들은 1,2,3,4나 I Feel It All과 같이 포근한 포크송이지만, 이번 앨범은 강렬하게 빛나는 순간을 노래하는 곡들로 주로 채워져 더욱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가 노래하는 "기쁨"은 단순히 행복만을 일컫지 않는, 다양한 결들로 나뉠 수 있는 총체적인 감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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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을 마무리하며, 다수의 매체들은 Solange의 'A Seat at the Table'을 최고의 음반으로 선택했다. 앨범을 채우고 있는 유려한 R&B 트랙은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하기에 충분했지만, 이 앨범을 무엇보다도 빛나게 만드는 것은 부드러운 멜로디를 타고 전파되는 강한 메시지다. Solange는 이 앨범을 통해 흑인 여성으로서의 삶을 담담하고도 직설적인 어조로 말한다. 


싱글 컷된 곡 'Don't Touch My Hair'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Solange는 이 곡을 통해 흑인 여성의 입장에서 겪게 되는 외부의 시선과 태도를 정면으로 비판하는데, 가사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Don't touch my hair

내 머리를 건드리지 마

When it's the feelings I wear

그건 내가 드러내는 감정이야

Don't touch my soul

내 영혼을 건드리지 마

When it's the rhythm I know

그건 내가 아는 리듬이야

Don't touch my crown

내 왕관을 건드리지 마 

They say the vision I've found

그들은 내가 발견한 비전을 말하지 

Don't touch what's there

그냥 건드리지를 마

When it's the feelings I wear

그건 내가 드러내는 감정이야


여기서 머리(hair)는 영혼(soul)과 왕관(crown)과 같이, 누군가가 함부로 대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되는 요소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흑인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afro-textured hair로 분류되는 흑인들의 머리는 그 특유의 성질로 인해 열을 가한 펌 또는 일직선으로 곧게 편 스타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afro-textured hair를 위한 전용 헤어 제품이 따로 출시되기도 하며, '레게 머리'와 같이 흔히 흑인 스타일로 분류되는 dreadlocks, cornrow, 또는 braids 등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따라서 흑인들에게 머리란 다른 인종과 달리 스타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들에게 헤어스타일이란 흑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실제로 미국에서는 흑인 인권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흑인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헤어스타일을 저항의 표시로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고, 미용 산업을 통해 경제적인 자립을 시도하기도 하면서, 헤어스타일과 미용을 자신들의 존재를 가시화 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dreadlocks의 경우 자메이카를 발상지로 하는 종교인 라스타파리(Rastafari) 교인들의 상징으로 쓰이면서, 종교적인 의미도 함께 갖게 되었다. 

그러나 흑인들이 헤어스타일에 부여하는 이러한 의미가 타인종에게는 가벼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그들에게 흑인 고유의 헤어스타일은 규범을 벗어난 일탈 또는 흥미로운 구경 거리라는 이중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흑인 학생들은 특유의 헤어스타일로 인해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직장에서도 dreadlocks는 금지되곤 한다. 이렇게 억압과 차별의 상징처럼 간주되는 헤어스타일은 또 한 편으로는 매력적인 패션 아이템처럼 받아들여지는 양가적인 속성을 지닌다. 앨범 발매를 앞두고 게재된 인터뷰에서 Solange는 이와 관련된 자신의 경험을 토로하기도 했다. 


"저는 패션 화보를 비롯해 패션과 연관된 여러 매체에 많이 참여했다고 생각하는데, 패션업계는 아직도 백인이 지배적인 산업이어서, afro인 제 머리를 형식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그것이 패션계에 미치는 영향의 덧없음을 느끼기도 해요. 유명 잡지의 한 백인 에디터는 할로윈을 맞아 얼굴을 검게 칠하고 afro 가발을 쓰며 자신을 Solange라 칭하더군요. 연예인 닮은 꼴을 주제로 했던 또 다른 잡지에서는 저를 개에 빗대었어요. 제 머리가 말 그대로 개를 닮았다면서요. 그래서, 머리는 제게 컴플렉스예요. 어머니께서 제가 2회 연속으로 진행했던 공연(two-show run)에 오셨는데, 4일 간의 여정에서 그 모든 micro-aggressions(일상 속에서 의도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소수자 차별)을 겪으면서 저는 어머니께 제가 스트레이트 펌만 했어도 보다 편한 마음으로 이동할 수 있었을 거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이 곡은 매일 일상 속에서 나의 정체성이 도전받을 때 느끼는 감정에 대한 것이에요. 머리를 만지는 행위 자체도 매우 문제 있는 것이지만요!"


흑인들은 헤어스타일을 이유로 사회에서 배제되나, 그들을 배제한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스타일을 칭송하기도 하며, 따라하기도 한다. 흑인이 아닌 인종들이 선보였을 때 아름다워 보이고 멋져보이는 스타일링이라는 평가 이면에는 이로 인해 낙인이 찍히는 흑인의 존재가 지워진다. 이렇게 동일한 스타일을 두고 인종간의 위계질서가 발생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것이 유래된 맥락과 의미는 제거된 채 차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에는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라는 이름이 붙는다. 따라서 Solange가 말하는 '건드린다'라는 의미는 단순히 물리적인 간섭이나 억압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음대로 가져가 제멋대로 활용하는 행위까지 포함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노래는 이와 같이 이어진다. 


They don't understand

그들은 이해하지 못해

What it means to me

그게 내게 무슨 의미인지

Where we chose to go

우리가 어디로 가기로 했는지

Where we've been to know

우리가 어디에서 알게 되었는지


사회적 약자/소수자를 향한 폭력적인 시선은 억압의 양태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탄압의 양상이 드러나는 가운데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차용하고 활용되는 것 역시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다. 그래서 패션을 포함한 대중문화(특히 흑인 문화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힙합 문화)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흑인들의 헤어스타일은 문화적 전유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중 문화의 역할 중 하나는 그 사회의 합의점 또는 지향점을 제시하는 것으로, 결국 사회가 담고 있는 논리를 재생산하는 촉매 역할을 수반한다. 따라서 차별/혐오와 같은 맥락을 지니는 행동을 그대로 담아낸다면, 이 사회에 소수자의 존재를 지워도 무방하다는 시그널을 주는 것과 같다. 비록 그것이 의도한 바가 아니더라도, 그 의도없음조차 약자/소수자의 존재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서양문학에서 통용된 라틴어 구절인 'Noli me tangere'는, 부활한 예수가 그와 마주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건내는 말로서, 직역하면 '내게 손대지 마라'라는 의미를 지닌다.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토마가 예수의 몸에 난 상처를 직접 만진 뒤 그것이 사실임을 깨닫고 뉘우치는 장면 역시 잘 알려진 예화로, 카라마조의 명화로도 남아있다. 이렇게 누군가의 신체를 만지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불손하거나 불경한 것으로 여겨져왔는데, 흑인들이 마주하는 문화적 전유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맥락일 것이다. 이제는 문화적 전유가 이루어져 온 과거를 되짚고 그 안에 담긴 혐오와 차별의 맥락을 뜯어보아야 한다. Solange가 후렴구에서 던지는 이 끊임없는 질문은, 이제 우리 앞에 던져진 숙제와도 같을 것이다. 


What you say to me?

내게 뭐라 한 거야?


Music2016 올해의 앨범

2016.12.31 19:42

한 해가 끝나갈 땐 연말결산을 해야하는 법

올해 들었던 앨범 중 가장 좋았던 것들 몇 장 추려서 올려봅니다. 딱히 순위는 없음


1. ANOHNI - Hopelessness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사운드와 함께 돌아온 ANOHNI는 여전히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준다. 그러나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날카롭다. 환경 문제부터 정치적인 이슈까지, 우리 사회를 둘러싼 사회 문제들을 노래하는 목소리는 우리에게 빠른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2. The Avalanches - Wildflower

오랜만에 복귀한 The Avalanches지만 그 명성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클래스가 남다르다"라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걸출한 앨범은 그간의 오랜 기다림을 해소하고도 남을 정도로 풍부한 사운드와 위트 있는 센스를 보여주고 있다. 첫번째 트랙을 한 번 재생하면 쉽게 멈추기 어려운 앨범


3. GoGo Penguin - Man Made Object

세 명의 멤버만으로도 남부럽지 않은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GoGo Penguin은 이번 앨범에서 더욱 더 대담한 발걸음을 옮긴다. 쉴새없이 날아다니는 것 같은 피아노, 드럼, 베이스는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주어진 것 이상으로 해내고 있다. 한 곡 한 곡 넘어갈 때마다 서로 다른 장르의 책을 읽는 것 같은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앨범이다. 


4. BADBADNOTGOOD - IV

GoGo Penguin과 함께 올해 재즈의 영역에서 맛본 기대 이상의 성취. 이번 앨범에서는 여러 아티스트와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그 지평을 넓혔고, 이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행보를 보여준다. 라이브가 매우 기대되는 팀인데 부탁해요 서재페....ㅠㅜㅠㅜㅜㅠㅠ


5. Radiohead - A Moon Shaped Pool

"라디오헤드"를 떠올렸을 때 익히 연상할 법한 분위기의 곡들이지만, 역시 라디오헤드는 녹록치 않은 팀이라는 것을 또 한 번 증명해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제작한 뮤직비디오, 그리고 인스타그램에서 진행한 vignette 이벤트 등 음악 못지 않게 짜릿한 시각적인 경험을 선보인 것도 참 라디오헤드 답다. 그간 라이브에서 선보였으나 스튜디오 버전으로 발매되지 못했던 곡들을 수록했다는 점에서는 팬들에게 감사함을 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6. Bon Iver - 22, A Million

한 때 Bon Iver를 검색하면 "포크" "어쿠스틱" 같은 단어가 함께 나타나기 마련이었는데, 이 앨범을 듣고 나면 그런 연관 검색어에 의문을 갖게 된다. 뒤틀리고 왜곡된 목소리는 Justin Vernon이 새롭게 장착한 무기와 같으면서도, 동시에 감정적인 영역을 크게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이 앨범을 감상했던 순간들을 잊지 못하게 하는 킬링 포인트.


7. St. Paul & the Broken Bones - Sea of Noise 

소포모어 징크스라는 말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자신감으로 가득찬 앨범이다. "소음의 바다"라는 제목이 반어적으로 들릴 정도로 풍부한 브라스와 깊은 보컬을 담아내면서, 이들의 음악적 지평은 얼마나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된다. 


8. Solange - A Seat at the Table & Beyonce - Lemonade

올해 팝 씬에서 가장 빛났던 이 두 장의 앨범은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을 음악적으로 승화시킨 아주 훌륭한 예시로 꼽을 수 있다. 세계적인 뮤지션이기 이전에 흑인 여성으로서 이 사회를 마주하는 자매의 목소리는 다양한 장르와 접근법으로 큰 호소력을 발휘한다. 감미로운 발라드, 블루스, 락앤롤에 이르는 넓은 스펙트럼과 곳곳에 자리잡은 가족들의 생생한 증언, 나아가 비디오와 필름과 같은 시각적 요소까지, 감성의 영역에서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성의 영역으로 돌아와 이 세상을 냉철하게 바라보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우리가 꼭 잊지 말아야 할 앨범이다.


9. 키라라 - Move

"예쁘고 강한" 이라는 수식어가 정말 제대로 들어맞는 뛰어난 댄스 음악으로 가득하다. 강렬한 비트 위에 쌓여진 다층적인 사운드의 활용에서는 체계적이고 지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다. 부담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즐기고 나면, 왠지 모르게 이 현실을 헤쳐나갈 힘이 생겨나는 것 같은 건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닐 거다. 


10. 실리카겔 - Silica Gel

올해 한국 인디 씬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밴드였던 실리카겔의 첫번째 정규작은, 우리가 기대했던 모든 것들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악기와 목소리가 서로 얽혀 거대한 숲을 만들어가는 전개는 이 앨범에 호흡을 불어넣고 생동감을 부여한다. 살아있는 생물체와 같은 역동감과 유기성에서 앞으로 이 밴드가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지 기대감을 갖게 된다. 


11. 이민휘 - 빌린 입

무키무키만만수로서 선보였던 기상천외하고 독특한 사운드에서 한 발 물러나 내면을 탐구하는 음악들을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OST에서 살짝 맛본 사색적인 정서는 이 솔로 앨범을 통해 더욱 짙어지고, "발화"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련의 행위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우리는 무엇을, 누구에게, 어떻게, 왜, 말하고 전달하고 싶어하는 걸까


12. SHINee - 1 of 1

<Odd>에서 추구했던 예전보다 여유롭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이어받으면서, 샤이니를 샤이니답게 만드는 정교함을 찾을 수 있는 꽉 찬 앨범. 전반적으로 레트로 감성을 풍기지만 그것은 단순히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를 현재의 공간에서 재해석하며 더 멀리 나아가고자 하는 도약임을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 대중음악계가 샤이니를 아끼는 이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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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드 <블랙 미러(Black Mirror)>의 시즌 3 공개를 맞아 Little White Lies에서 작가 찰리 브루커(Charlie Brooker)와 진행한 인터뷰를 가져와봅니다

- 스포일러는 거의 없지만 시즌 3를 포함한 <블랙 미러> 에피소드를 모두 보신 분들이라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습니다.

- 각 에피소드들의 제목은 한국 넷플릭스에서 번역한 것을 따랐습니다.

- 원문은 여기서 보실 수 있어요

- 오역 오타 수정 및 기타 문의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찰리 브루커: '티비에서 돼지랑 그 짓을 했을 때(f**ked a pig), 허용치에 대한 기준을 바꾼 거예요.'


<블랙 미러>의 작가가 넷플릭스(Netflix)로 드라마가 이전한 것과 그가 왜 캐릭터들을 괴롭히길 좋아하는지에 대해 말한다. 


영국인 작가이자 방송인인 찰리 브루커를 인터뷰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는 것은 조금 이상하게(perverse)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의 여러 장르가 뒤섞인 SF(sci-fi) 시리즈 <블랙 미러>가 채널 4에서 스트리밍 거물인 넷플릭스로 이전한 것을 뒤집어 보면(mirroring), 희한하게도 잘 어울린다. 토론토에서 새 시리즈를 선공개하면서 ― '샌 주니페로(San Junipero)'와 '추락(Nosedive)'를 상영하면서 ― 브루커는 넷플릭스의 세계적인 작업 환경(canvas) 위에서 작업할 기회와 일어서서 글을 쓰는 것(집에 있는 플레이스테이션 4와 함께)의 장점, 그리고 그가 끔찍하고 암울한 결말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관해 논했다.


LWLies: 텔레비전 방송에서 넷플릭스로 이전한 건 <블랙 미러>를 미국 인구의 절반이 넘는 8천만명이라는 전세계의 구독자들에게 공개하게 했습니다. 그 새로운 시청자들이 당신이 새 시즌을 준비하는데 영향을 미쳤나요?

브루커: 그렇진 않았습니다. 이번 시즌에서 처음으로 썼던 극본이 '샌 주니페로'였는데요, 의도적으로, 또는 약간은 장난스럽게(impishly) 생각은 했었어요. 왜냐면,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이 작품이 미국식으로 변하는 것(Americanised)을 우려하는 글을 읽었기 때문에, 전 "그래, X까. 하나 쯤은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해두지. ― X발!  ― 난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라고 생각했거든요. 정말로, '국가(The National Anthem)'를 제외한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그 어느 곳이라도 배경으로 삼아도 무방했고, 그 어디도 배경으로 삼지 않았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차이점은 러닝 타임인데, 융통성이 있어서, 90분짜리도 있고, 몇몇은 그보다는 짧기도 하고, 살짝 확장된 작업환경이었네요.

이 새로운 에피소드들을 계획하는데 착수하면서, 그 확장된 작업 환경이 창작의 관점에서 어떤 걸 제공했나요?

중요한 점은, 분위기가 조금 더 다양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꼭 암울한 것만 가득하지는 않아요, 예상이 가능하니까요. 우리는 정말 소름끼치는 결말을 가진 7개의 에피소드를 만들어왔어요. 그리고 우리는 마치 서로 다른 장르의 영화들을 만드는 것과 같은 관점으로 새 시즌에 접근했죠. 그래서 '샌 주니페로'는 마치 어른들을 위한 드라마(coming of age drama), 로맨스, 존 휴즈(John Hughes *<나홀로 집에(Home Alone)> 시리즈와 <조찬 클럽(The Breakfast Club)> 등을 제작한 작가 겸 감독) 영화 같은 작품이고, '추락'은 좀 더 사회에 대한 풍자'에 가깝고, '게임 테스터(Playtest)'는 <이블 데드 2(Evil Dead 2)>랑 비슷하죠. 이건 아주 기이하고 특이한 쇼예요. 서로 너무나 다르지만 동일한 배너(banner) 하에 묶이니까요. 좀 우습게(wanky) 말하자면, 우리는 "영화제의 큐레이팅 작업을 하는 것 같다"라고 생각했어요.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장르가 발상의 시작점이 되나요, 아니면 당신이 평가하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시작점으로 삼나요?

그런 관점에서는 약간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과도 같아서 독특하네요. 주로 일어나는 일들은, 제가 어떤 아이디어를 갖고 있거나 또는 무언가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가끔은 그게 갑자기 충돌을 일으키며 "만약(what if)"에 대한 아이디어가 되고요. 어떤 때는 그게 굉장히 빠르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오, 이거 추리물 같은 느낌인데, 이런 거 지금까지 해보진 않았고"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그렇지만 이 과정은 흥미로워요. '게임 테스터' 에피소드는 제가 "<블랙 미러> 버전의 귀신 들린 집 이야기는 어떤 걸까?"하며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왔으니까요. 대화 없이, 단 한 사람에 대해서, 한밤중에 귀신 들린 집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는, 가끔은 그냥 유용한 정신적인 트릭이 되기도 해요. "스칸디나비아 느와르 스타일의 <블랙 미러>는 어떨까?"를 고민했던 건요. 90분짜리인, 우리의 북유럽 느와르물인 '미움받는 자(Hated in the Nation)'가 바로 그거고요. 



그런 점이 당신이 에피소드를 써내려가는 실제 과정에도 변화를 준 건가요? 당신은 이미 방영시간이 정해져있는 TV에서 융통성 있는 넷플릭스로 옮겨왔죠. 하지만 90분이라면, 사실상 영화 한 편인데요.

기본적으로는 영화예요. 장편 영화죠. 추리물이기 때문에 그 에피소드는 유난히 복잡합니다. 모든 것들을 다 계획해내야 했고, 지긋지긋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렸죠. 미스터리 스릴러였기 때문에 굉장히 정교한 줄거리를 만들어내야 해요. 마치 전혀 다른 근육을 쓰는 듯한 느낌이었죠. 그리고 '샌 주피네로'처럼 그런 생각들을 안 하고 쓴 이야기들도 있어요. 전 사람들이 이런 말 할 때마다 "이 순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지만, 막말로, 제가 어떤 장면을 쓰고 있는데 등장인물 중 하나가 뭔가를 말하고 전 "와 X발 이거 끝내주는 아이디언데!"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밀어붙어요. 그런 놀라움인 거예요. '곧 돌아올게(Be Right Back)'가 제가 트랜스 같은 상태에서 썼던 또 다른 이야깁니다. 머리 속으로 영화를 재생시켜서, 키보드로 그걸 묘사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결국 결말에 도달하는 거예요. 글쓰기를 묘사하는 최악의 방법이네요....

이전에 Creative Screenwriting Magazine 소속의 한 사람이 왔었는데, "작가들에게 말해줄 조언이 있나요?"라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전 "네, 일어서서 쓰세요."라고 말했죠. 왜냐면 그 당시 즈음해서, 전 아마존에서 저렴하게 파는 작은 스탠드를 하나 사서 서서 글을 썼어요. 조금 불편한 느낌 때문에요. ― 아예 못 쓸 정도로 불편한 정도는 아니고, 살짝 불편하죠. 그말은 즉, 무엇보다도 그 짜증나는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결국 인터넷을 하는 것으로 빠지지 않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전 25분 동안은 글을 쓰고....나가서 잠깐 플레이스테이션을 해요. 이런 걸 밤새 하는 거예요. 야행성이 되죠. 그리고 다시 돌아가서 글을 조금 더 쓰고, 또 가서 플레이스테이션을 하고, 또 돌아오고...그리고 그때쯤 되면 다행히도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지겨울 정도로 오랜 시간동안 글을 쓰게 되는데, 그 부분이 바로 짜릿함을 느끼는 지점이에요. 그래서 제가 작가들에게 하는 조언은 항상 이런 거예요. 일어서서 글을 쓰고, Scrivener(*글쓰기 전용 소프트웨어의 한 종류)를 마련하고, 25분동안은 집중해서 쓰고, 플레이스테이션을 하나 장만하세요.  

당신의 글에서 드러나는 목소리는 TV 극본과 산문 모두에서 언제나 또렷하죠. 글쓰기가 당신에게 쉬운 편인가요?

아뇨, 그건 항상 이를 X나 뽑는 것과도 같았어요. 전 글쓰기를 싫어해요. 지금까지 써왔던 건 좋아하지만, 글을 쓰는 건 싫어해요. 지면에 매주 칼럼을 연재했을 때, 전 그게 엄청나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그만뒀어요. 그러고 나서, 그다지 오래된 일은 아닌데, New Yorker가 제게 글 하나를 써달라고 부탁을 했, 전 "오 이거 New Yorker잖아 ― 그럼 이거 해야겠네!"라고 생각했죠. 그건 악몽이었어요. 약 1년 간은 기사나 칼럼 하나도 쓰지 않고 있었으니까요. 글 쓰는 방법을 잊어버려서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특정한 글쓰기의 근육을 연마했던 때가 그립진 않나요?

그립진 않아요. 그렇게 즐기면서 했던 건 아니었거든요, 결국에는요. 그렇게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다 소진한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해서 어느 정도는 그립긴 해요. 그런 때가 다시 올 거고, 그런 글이나 장편의 줄글을 쓰고 싶을 거라고 확신해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아니에요. 그건 마치, 오랜 시간 동안 만화가로서 커리어를 시작했을 때, 말풍선 작업에 지겨움을 느꼈던 것과 비슷해요. 제 경력의 어떤 부분을 모두 날려버린 건데, 좀 무서운 일이죠. 

<블랙 미러>를 하나로 묶는 분위기란 어떤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경고하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아마도 사색적인 것일까요?

네, 사색적이에요. 전 이 드라마를 경각심을 주는 이야기로 보진 않아요. 경고하는 이야기가 되려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해줘야 해요. 전 뭐가 됐든 그에 대한 해결책이 뭔지는 전혀 몰라요. 전 그냥 걱정하는 사람인거죠. 그래서 암울한 이야기라고 하면, 그건 그냥 그 이야기 속에 큰 소리로 걱정을 하는 제가 있는 거예요. 가끔 전 단순하게 등장 인물들을 괴롭히는 걸 즐겨요. 왜냐면 <환상특급(The Twilight Zone)>이나 <Threads> 같이 제가 어렸을 때 즐겨 보던 이야기들이 그랬거든요. 또는 <La Sabina>라고 하는 70년대 스페인 단편 영화 같이요. 이거 유튜브에 있어요. 영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말하지 않을게요. 잘 모르겠지만, 전 아주 끔찍하고 암울한 것들에 매료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이야기들을 쓸 수 있는지 알아보면서, 그걸 여전히 <블랙 미러> 시리즈로 만들어 내는 것은 좋은 연습이 돼요.

이렇게 별개의 파트들로 구성된 앤솔로지 시리즈라는 건, <블랙 미러>를 프로그램 정주행(binge-watching)의 고장인 넷플릭스의 변종처럼 느끼게 합니다. 그게 제작에서 고려되었나요?

매번 다루는 에피소드가 다르다는 점에서, 넷플릭스는 앤솔로지 시리즈에 완벽한 플랫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으로, 각 에피소드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쇼를 만들 땐, 손에 땀을 쥐게 하면서 끝내거나 인물을 다시 등장시키지는 않으니까요. 그리고, 흥미를 끌어 올리려면, 또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이 쇼가 존재한다는 걸 상기시키려면, 사람들이 다시 찾아올 여지를 남겨야 해요(you'd have to trail it). 어떤 면에서는 스포일러를 하도록 이끌지만요. 우리는 이게 광고하기에는 아주 어려운 쇼라는 점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어떤 것도 말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여지를 남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서 넷플릭스나 아마존, (BBC의) iPlayer와 같은, 모든 편을 한번에 접할 수 있는 플랫폼들이 이제 나온 거죠.

언젠가 누군가가 좋은 비유를 썼더라고요. 그건 마치 집에 있는 벽장(cupboard)과도 같은데, 거기 있었는 줄도 몰랐던 거죠. <기묘한 이야기(Stranger Things)>가 시작되고, 유명한 작품이 되면서(became a thing), 갑자기 모두가 <기묘한 이야기>를 봐야 했어요. 사람들은 "<기묘한 이야기> 아직 안 봤어? 안 봤다고? 어, 그거 너네집 그 벽장 안에 있어. 가서 한 번 봐봐"라고 말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첫 방송에 대한 압박을 느끼지 않아요. TV 방영은, 축구 중계가 방영된다고 생각하면 조금 위험하죠. 앤디 머레이(Andy Murray)가 갑자기 윔블던에서 우승을 해서 그게 당신이 보는 쇼와 동시에 방송을 탄다고 하면, 결과적으로는 그 쇼는 타격을 입어요. 모두가 평가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신경 쓰고 있어요. 그래서 평가가 점점 덜 중요해지고 있다는 건 좋은 일이고, 유효기간(shelf life)이 더 길어지죠.

새 넷플릭스 시리즈에서 Channel 4에서는 할 수 없던 걸 해봤나요?

그냥 러닝 타임이요, 정말로요. 내용 측면에서는 딱히 없네요. 제 방송 생활을 통틀어, 제 생각에, 전 운이 좋게 살아왔던 것 같아요. 기이할 정도로 운이 좋았어요. TV에서 돼지와 그 짓을 했을 때, 허용치에 대한 기준을 바꾼 거예요.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루크 케이지(Luke Cage)>의 방영을 맞아 Little White Lies에서 작성한 칼럼

- 원문 열람은 여기서

오역 지적은 댓글 주세요 'u'



다양성을 추구하는 투쟁이 텔레비전(small screen)에서 승리를 거두는 방법


- 마블의 <루크 케이지(Luke Cage)>가 인종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지만, 이 스튜디오의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그 진행 속도는 훨씬 더 느리다.


"다양하다"(diverse)라는, 이보다 더 나은 단어를 찾을 수 없는 특징을 가진  TV 쇼와 영화를 만드는 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생각이 있다. 첫째는 BBC의 인종에 구애받지 않는(colour-blind) 캐스팅과 가까운 것이다. 서로 다른 인종, 젠더, 성지향성(sexual orientation)을 가진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그러한 것들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문제를 정면돌파 하고, 인정하고, 논의하며 불평등에 저항하고, 이것이 중대한 사안임을 받아들여 이를 문화적 담론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마블의 <루크 케이지>가 바로 후자에 해당한다. 


이 회사의 세 번째 넷플릭스 공개작은 산처럼 건장한(man-mountain) 마이크 콜터(Mike Colter)를 제목과 동명인 히어로로 캐스팅하여, 2015년 <제시카 존스(Jessica Jones)>에서 맡았던 배역을 한 번 더 맡겼다. 그는 초인적으로 힘이 세고(super-strong) 거의 완벽에 가깝게 상처를 입지 않는데, 이는 자만심에 찬 미소를 띈 마허샬라 알리(Mahershala Ali)가 연기하는 할렘의 갱스터 코튼마우스(Cottonmouth)로부터 거리를 지키는데 그가 적격임을 보여준다. 


흑인인 주역을 부각하는 것은 <루크 케이지>를 다른 슈퍼히어로 영화 가운데서 단연 돋보이게 하기에 충분하나, 이 쇼는 거기에서 몇 발 더 멀리 나아간다. 주요 배역을 연기하는 거의 대부분의 배우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거나 히스패닉이다. 힙합, 소울, 모타운(Motown)은 사운드트랙에 영향을 미쳤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민권 운동을 이끌던 사람들의 이름이 일상처럼 등장하고, 심지어 Black Lives Matter도 피상적으로 언급되곤 한다. 쇼는 경찰의 잔인함도 정면으로 마주한다. 2016년, 총알에도 끄떡없는 흑인 남자라는 발상은 이와 유난히 밀접하고 역설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 드라마는 사실 매우 진보적이어서 지금 인터넷 한 구석(왜, 절대로 방문하고 싶지 않은 곳들 있지 않은가) 에서는 백인 배우가 충분히 등장하지 않는다며 한탄하는 사람들로부터 인종 문제에서의 역차별을 이유로 비난을 받고 있다. 이러한 "비평가들(critics)"은 <제시카 존스>의 탄생에 들어있던 급진성(progressiveness) 정도는 예상했어야 했다. <루크 케이지>가 인종차별에 도전하는 것처럼, <제시카 존스>는, 중요하게 부각되고 결함을 갖고 있는 여성 캐릭터들과 학대적인 관계에 가하는 초능력의 일격을 통해 성차별을 다룬다.


함께 놓고 보면, 두 작품은 마블 영화(big screen)의 놀라울 정도로 적은 다양성(diversity)으로 시각을 넓히게 한다. 마블의 가장 큰 프랜차이즈 영화들에서는, 백인 남성 배우가 아니라면 아마도 별로 중요치 않은 배역(backseat)이나, 사이드킥이나, 긴장감을 잠시 푸는 코믹한 역할이나 연애상대에 머물 것이다. 올여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Captain America: Civil War)>에서 첫 선을 보이고 2017년에는 마이클 B. 조던(Michael B. Jordan)과 루피타 뇽오(Lupita Nyong'o)와 함께 자신의 솔로 영화로 돌아올 채드윅 보스먼(Chadwick Boseman)의 블랙 팬서(Black Panther)에서 긍정적인 변화들을 찾아볼 수는 있다. 이외에도 에반젤린 릴리(Evangeline Lilly)는 <앤트맨과 와스프(Ant-man and the Wasp)>에서 공동 주연으로 업그레이드 되었고, 한편 브리 라슨(Brie Larson)은 <캡틴 마블(Captain Marvel)>에 출연함으로서 마블의 첫 단독 여성 주연이 될 예정이다. 그럼에도, 당분간은 젠더 또는 인종에 대한 어떤 심각한 논의도 가끔 툭 던지는 우스개소리로 늘 그래왔듯이 격하될 뿐이다.


지금까지 방영된 총 다섯 편의 마블 티비 시리즈 중 세 편은 흑인 남성이나 여성을 전면으로 내세웠다 (<에이전트 카터(Agent Carter)>까지 포함해서). 반면, 마블 스튜디오는 13편의 영화에서 단 한 번도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으며, MCU(Marvel Cinematic Universe)는 우리가 영화 포스터의 전면 또는 중앙에서 백인 남자 이외의 다른 누군가를 보기 전까진 18편의 영화로 확장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상황은 더 나아지기도 전에 더 나빠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봉을 앞둔 <닥터 스트레인지(Doctor Strange)>는 오리엔탈리스트(orientalist)와 백인 취향의 비유가 섞인 60년대의 원작을 최근에 맞춰 업데이트 해야하는 골치아픈(unenviable)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영화의 캐스팅은 최소한으로만 밝혀도 흥미롭다.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이 에이션트 원(Ancient One)(마법을 부리는 티벳인인 미야기씨라고 생각해보라)으로 출연하는 것은 캐릭터의 성별 반전과 화이트 워싱(whitewashing)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점에서 비판과 찬사를 동등한 수준으로 이끌어낸다. 


아마도 마블의 이질적인 분야 간의 가장 큰 비교점은 내년에 넷플릭스에서 첫 선을 보일 <아이언 피스트(Iron Fist)>에서 나타날 것이다. <닥터 스트레인지>와 같이, 이 쇼는 비술(秘術)을 배우기 위해 아시아를 여행하는 부유한 백인 미국인을 따라갈 예정이다. 또한 구시대적인 고정관념과 낡은 비유들에 대해서 고민해야만 한다. 이 시리즈는 마블 텔레비전의 첫 난관이 될 수도, 또는 백인 어벤저스들의 홍수에 지친 누군가가 텔레비전 쇼에서 큰 도약을 할 수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