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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

Fuji Rock Festival '19 - Day 2

Day 1: https://tripandtrap.tistory.com/35?category=579659

1. Unknown Mortal Orchestra

함께 간 지인의 말에 따르면 UMO를 안 보는 건 마치 처음 해외여행 왔는데 가족들 선물 안 사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데 듣고 엄청 웃었다ㅋㅋㅋ이보다 더 UMO 공연을 잘 요약할 수 없기 때문에.

장르가 점점 다양해지고 동시에 미디어 믹스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요즘, 뮤지션이 음악으로만 승부수를 띄우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건 보통 자신감과 실력으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전략이 된다. UMO는 그런 자신감과 낙천성을 자랑스레 내보이는 밴드다. UMO만의 유니크한 비트와 화려한 연주 실력은 백드롭 하나 없는 화이트 스테이지를 가득 채웠다. 게다가 첫 곡에서부터 관객석으로 내려와 기타를 들고 행진하고, 펜스 쪽 관객들과 함께 섞여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자연스레 박수와 호응을 유도해내는 무대 매너도 수준급이었다. 밴드의 본분에 충실하되 과감할 땐 또 과감해지는 팀이었다.

여행지를 대표하는 기념품들은 막상 생각했을 땐 너무 뻔해보이지만, 그만큼 그 도시를 잘 요약하고 상기시킬 아이템은 또 없기에 관광객들에게 오래도록 사랑을 받는다. UMO도 그런 밴드다. 단촐해보이지만 음악의 힘을 가장 잘 표현하며, 그 특성을 누구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래서 타지에서 추억으로 남기기에 가장 적합한 선물 같은 밴드. 

 

2. Courtney Barnett

후지록 3일을 통틀어서 최고의 "락스타"를 꼽자면 0.1초도 망설이지 않고 코트니 바넷의 이름을 댈 수 있다. 기타, 소울, 바이브..그냥 모든게 다 나타나는 딱 그 느낌. 왼손잡이용 기타 쓰는 것도 어쩜 그렇게 멋있어 보이는지.

다른 페스티벌에 등장한 코트니 바넷의 무대를 유튜브 스트리밍으로 볼 때도 그 생생한 에너지가 고스란히 전해졌었는데, 실제로 마주한 코트니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포스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언니 제다이세요?(야)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는 필요도 없고, 그저 느끼는 대로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고 소리를 지르는 코트니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짜릿한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런 자유분방한 여성 롤모델이 내 눈 앞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니😭 그리고 코트니의 두번째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분노와 날것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어서인지, 전날 자넬 모네를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을 다시금 경험할 수 있었다. "I'm not your mother, I'm not your bitch"를 어떻게 따라부르지 않을 수가 있어👍

바로 다음 타임인 Alvvays의 무대가 레드 마퀴에서 시작되어서 코트니의 마지막 곡을 BGM 삼아 이동을 시작했는데 하필 그게 1집 앨범에서 정말 즐겨들었던 Pedestrian at Best여서 안타까움에 울뻔 했지만 어른이는 울지 않았습니다 코트니처럼 강철 마인드로 살아가자고 거듭 다짐했거든요

 

3. Alvvays

갑자기 쏟아진 비 때문인지 alvvays 타임의 레드 마퀴엔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말 그대로 발 디딜 틈 없을 정도. 무대도 거의 안 보였고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에서 불편하게 공연을 볼 수 밖에 없었는데(나도 몰리 언니 보고 싶었다고...)그런 불편함을 만회할 정도로 밴드는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아직 단 두 장의 정규 앨범을 발매한 오래지 않은 커리어지만, 밴드의 연주에서는 왠지 노련미가 느껴졌다. 후지록의 음향이 좋은 덕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악기들이 조화를 잘 이룬다고 해야하나.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무엇하나 어긋나지 않는 절제와 균형의 미가 있었다. 음원으로 듣는 깔끔함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단정한 사운드가 매력이었다. 보컬 멀리의 목소리도 마찬가지. 꿈꾸는 듯한 부드러움이 있다가도 날카로울 땐 또 파고드는 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폭우를 피하기 위해 레드 마퀴에 들렀던 사람이라도 이 날만큼은 Alvvays의 팬이 되어 돌아갔을 것 같다. 다음에는 더 즐거운 마음으로 라이브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오길 바라며...국내 공연 기획사들이 이 밴드를 섭외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4. American Football

American Football을 처음 들었을 때, 팀명으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장르인 곡이 나와서 조금 당황했었던 기억이 있다. 이런 스포티한 이름을 짓고 정작 하는 음악은 포스트 매스락이라뇨.

그래서 라이브가 유독 궁금했던 밴드였다. 주변에 공연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공연을 실제로 본 사람은 없어서 더욱. 그런 설렘과 기대감으로 처음 만난 밴드는, 궂은 날씨에 전혀 굴하지 않는 강건한 팀이었다. 이래서 "미식축구"라는 이름을 붙인 걸까. 실로폰을 시작으로 사운드를 서서히 쌓아올려가는 Silhouettes로 문을 연 공연은, 정교하게 계산된 듯 절제된 깔끔한 연주로 침착하게 곡들을 엮어나갔다.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관객들이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비가 정말 해도해도 너무 할 정도로 많이 왔던 건 사실이라, 이 공연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라는 생각이 앞서서 집중하기 어려웠던 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다음엔 날씨 좋을 때, 아니면 실내에서 다시 한 번 더 만나고 싶은 팀. 그땐 더 귀기울여 들어볼게요 또 만나요 제발!

 

5. Sia

Sia의 공연을 어떤 말들로 표현할 수 있을까? 사실 기록으로 남기기 제일 어려운 공연인 거 같다. 특이한 형식이 주는 분위기와 라이브로 듣는 Sia의 목소리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매력이 있다. 그래도 그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뭐라도 써보려고.

보통 라이브에서는 노래나 연주를 하는 뮤지션이 중심이고 댄서와 영상이 보조적인 역할을 하기 마련인데, Sia는 반대로 조연을 자처한다. 그는 무대 한쪽 구석에 서서, 멘트 하나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꿋꿋하게 노래만 부른다. 대신 그를 대변하는 듯, 그와 똑같은 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댄서들이 무대 중앙에 나타나 다양한 안무와 표정으로 각 곡의 정서를 표현한다. Sia의 노래는 그래서 마치 사운드트랙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쯤 되면 내가 라이브를 보러 온 건지, 현대무용 작품을 감상하러 온 건지 헷갈리게 된다.

하지만 이보다 더 Sia의 음악을 잘 표현할 수 있는 형식도 없는 것 같다. Sia의 목소리에는 여러 감정이 응축되어 있는데, 정적인 것 같아보여도 그 안에는 굉장히 역동적인 감정의 소용돌이가 있다. 그래서 Sia는 다양한 페르소나를 구현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모두 일부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굳이 자기 모습을 내세울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 댄서들이 표현하는 감정들이 Sia보다 더 Sia 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공연이 다 끝나고 쿠키처럼 흐르던 백스테이지 영상에서, 댄서들과 Sia의 관계가 스태프들로까지 확장되는 듯한 묘사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더 굳힐 수 있었다. 하여튼 예술가와 그 창작물의 관계, 나아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객의 자세에 대해 여러가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무대다.

공연이 끝나고 Sia는 "I love you" 한 마디를 남기고 퇴장했다. Sia의 공연을 이전에 보았던 지인의 말에 따르면, Sia는 평소엔 공연에서 전혀 멘트를 하지 않는데 오늘 관객들은 진짜 운 좋은 거란다. 사실 Sia의 컨디션이 완벽한 편도 아니었고(몇몇 곡은 키를 낮춰서 불렀다) 비도 엄청나게 많이 왔지만 자리를 끝까지 지켜준 팬들을 위한 감사인사였던 것 같다. 완벽하지 않아도 이미 완벽한데 어떻게 그냥 가겠어요ㅠㅠㅠㅠ내한이 불발된 게 그저 안타까울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