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한 해, 귀를 즐겁게 해주었던 앨범들을 추려봅니다.  순서는 순위가 아닙니다. 


1. St. Vincent - MASSEDUCTION

극적인 연작무대를 보는 듯한 구성의 색깔있는 앨범이다. 수준급의 완급조절과 전작보다 풍부해진 사운드의 레이어는 좌중을 사로잡는 그녀의 강렬한 카리스마와도 닮아있어, St. Vincent의 오랜 팬이라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조섞인 능청스러움을 밝은 색채로 묘사한 <Pills>, 화려함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서정성을 노래하는 <New York>과 같은 싱글 컷 트랙과 더불어, 선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표제곡 <Masseduction>과 보컬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한 <Young Lover>까지, 다양한 장르와 분위기를 넘나드는 그녀의 1인극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2. Moses Sumney - Aromanticism 

어떤 장르보다도 로맨틱한 감성과 잘 연결되는 R&B를 빌어 Moses Sumney는 로맨스의 이면과 고독을 노래한다. 그러나 이는 전혀 쓸쓸하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마치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감싸안아주는 듯한 보컬과 편곡에서는 따스함이 묻어나기도 한다. 관계맺기에 대한 회의를 노래하는 <Don't Bother Calling>와 이카루스의 신화를 재해석한 <Plastic>이 우리에게 포근하게 내려앉는 트랙이라면, 직설적인 사운드로 고독을 외치는 <Lonely World>와 계속해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 질문하는 <Doomed>는 다소 철학적인 관점으로 우리를 이끈다. 사랑과 관계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반문.


3. Lorde - Melodrama

데뷔앨범 <Pure Heroine>에서부터 Lorde는 자신 그리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주변 환경에 대한 깊이있는 고찰을 녹여내는 아티스트였다. 그리고 <Melodrama>를 통해 이제는 조금 더 내면 깊숙한 곳에 있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한다. 본인의 실제 연애 및 이별에 기반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경험들은 Lorde가 이 세대를 관통할 수 있는 통찰력을 발견하게 된 계기도 함께 주었던 것 같다. 첫번째 트랙 <Green Light>는 이처럼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그녀의 음악을 선언하고, 마지막 트랙 <Perfect Places>는 그러한 여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한 번 더 선언한다. 이렇게 Lorde는 내일이 더 기대되는 아티스트임을 다시 또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4. The National - Sleep Well Beast

The National이 또 연타석 홈런을 때려냈다. 앨범을 거듭할 수록 The National은 우리를 깊고 어두운 숲속으로 인도하는데, 그 어둠은 점점 짙어짐에도 전혀 무섭거나 두려운 존재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이번 앨범에서 밴드는 실패한 관계와 불안정한 사회를 주제로 다루고 있지만, 그것에 절망하기보다는 이를 새로운 미래를 향한 도약으로 바꾸고자 하는 의지를 내비친다. 앨범의 제목이기도 한 마지막 트랙인 <Sleep Well Beast>가 동면을 노래하는 것처럼, 그 다음 세대를 기약하기에 절망과 종말로만 읽히지 않는 그들의 메시지가 유난히 가슴깊게 남는다.


5. SZA - Ctrl

올해 R&B는 물론 전 장르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신인 중 하나였던 SZA는 이 앨범으로 R&B 장르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벨벳처럼 부드럽고 안정적인 목소리로 자신의 불안감과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마치 이를 즐기는 듯한 가창력과 기교가 모든 트랙의 전반에 나선다. 기타 리프에만 기댄 A파트가 매력적인 첫 트랙 <Supermodel>과 팝 디스코적인 요소를 차용한 <Prom>, 피쳐링으로 참여한 Kendrick Lamar에 전혀 뒤지지 않는 파워를 보여주는 <Doves in the Wind>등, SZA의 잠재력에 더 큰 기대를 품게 하는 곡들로 가득한 데뷔앨범이다. 


6. Daniel Caesar - Freudian

위에서 언급한 SZA의 <Ctrl>과 함께 올 한 해 R&B를 이끈 또 한 장의 앨범. Daniel Caesar는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R&B의 문법을 충실하게 따르되 장르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을 매우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에게 음악이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면서, 사랑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안정을 찾는 여정을 그려낼 수 있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Looses>에서 <We Find Love>로 자연스레 넘어가는 장치라든가, 많은 사랑을 받았던 <Best Part>와 같은 타 뮤지션과의 협업 등, 들으면 들을 수록 감상 포인트가 많아지는 흥미로운 수작이다. 


7. Bjork - Utopia

치유를 노래하던 전작 <Vulnicura>에 이은 <Utopia>를 통해 Bjork은 또 자신만의 세계를 대중 앞에 공개했다. 이 세계로의 초대장을 전달하는 첫 트랙 <Arisen My Senses>에 숨겨진 마력처럼, 수록된 곡들은 앨범 타이틀이 뜻하는 '이상향'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과는 다르게 조금은 기이하고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이미지를 그려내지만, 그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역동적인 멜로디와 보컬에서 우리는 새로운 생동감을 경험할 수 있다. 첫번째 싱글로 공개된 <The Gate>를 발표할 당시 보다 넓은 의미의 '사랑'을 노래하고 싶다고 밝혔던 것과 같이, 모든 것을 따스하게 감싸안는 힘이 트랙 곳곳에 숨쉬고 있다. 


8. The XX - I See You

멤버들 간의 안정된 관계가 느껴져서 듣는 사람을 절로 흐뭇하게 만드는 앨범들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로 The XX의 이번 앨범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전작 <Coexist> 발매 이후 각자의 시간을 가졌던 멤버들에게는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더욱 조화롭고 편안한 분위기의 곡들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On Hold>와 <I Dare You>처럼 절로 리듬을 타게 하는 트랙과 함께, 차분하고 강렬한 사운드가 돋보이는 <Violent Noise>, 밴드의 시그니처와 같은 꿈 꾸는 듯한 고요함이 돋보이는 <Replica>등, 오랫동안 기다려온 팬들의 기대감을 웃도는 결과물에 2017년을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다. 


9. 새소년 - 여름깃

하늘을 나는 새 또는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뜻하는 이중적인 밴드명인 '새소년'의 의미를 잘 담아낸 데뷔 EP. 약간 언니네 이발관이 연상되기도 하는 첫트랙 <나는 새롭게 떠오른 외로움을 봐요>에서 맛본 씁쓸한 감정은 <긴 꿈>에서 이내 낭만을 머금은 것으로 다시 태어나고, <파도>에서 역동적인 파워를 과시하다 <새소년>에서 다시 다음을 기약한다. 정규 앨범이 아닌 EP임에도 워낙 다양한 감정들을 넘나드는 곡들로 채워져 있어 전혀 아쉬움이 느껴지지 않음과 동시에, 이들의 다음 결과물은 또 얼마나 찬란할지 기대감을 품게 된다. 


10. 전자양 - 던전

총 4개의 싱글로 나누어 발매되었던 곡들이 하나의 정규 앨범으로 묶였다. 싱글 발매 순으로 이어지지 않는 트랙 배치로 인해, 저마다의 개성으로 살아 숨쉬던 곡들이 새로운 맥락에서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전자양의 곡들은 즐거움과 흥으로 가득차있다가도 그 이면의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는 특이함을 갖고 있는데, '던전'이라는 타이틀이 바로 그런 매력을 함축적으로 묘사한다. <던전 1>과 <던전 2>에서 느껴지는 그런 포인트에 더불어, <사스콰치>와 <어두컹컹!>과 같이 전자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기꺼이 반길만한 곡들이 쉬지 않고 이어지는 앨범이다. 


11. Red Velvet - Perfect Velvet

케이팝 시장에서 걸그룹의 이미지는 주로 소녀의 대표적인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에서 그치거나 안전한 시도에 머물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레드벨벳은 이 앨범을 통해 거기서 과감하게 한 걸음을 앞서 나간다. 사랑을 유희처럼 즐기고 급기야 무기를 들고 나서는 타이틀곡 <Peek-A-Boo>의 서늘한 이미지가 워낙 강렬하지만, 사실 이 앨범은 그런 <Peek-A-Boo>를 뒷받침하는 수록곡들이 있어 더 빛나고 있다. 벨벳이란 타이틀에 걸맞는 고급스런 R&B인 <Kingdom Come>, 레트로한 감성의 여유가 느껴지는 <봐>와 "줄도 안 맞추고""제멋대로"인 트랙 <Attaboy>가 있어 이들의 행보는 더 큰 설득력을 발휘한다. 잘 기획된 컨셉의 정규 앨범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즐거움을 뽑아낸 모범 사례로 꼽고 싶다. 


12. DAY6 - Sunrise / Moonrise

하루에도 수 많은 곡과 아티스트가 쏟아져 나오는 케이팝 시장에서 1년 간의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은 어쩌면 시대를 역행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꾸준한 퀄리티를 유지하고 강한 설득력을 발휘하는 곡들로 전개된다면, 이것은 오히려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Every Day6> 프로젝트가 증명해냈다. 상반기의 <Sunrise>는 새로운 도전과 다양한 장르들로 가득하고, 하반기의 <Moonrise>는 밴드의 트레이드 마크인 감성적인 트랙과 가사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곡들로 채워져 있어, 이 밴드가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을지 기쁜 마음으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한다.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깨닫게 해주는 알찬 결과물이다.


13. Kamasi Washington - Harmony of Difference

지난 2015년, 스케일과 구성면에서 모두 압도적인 앨범 <The Epic>으로 극찬을 받았던 Kamasi Washington은 이번 EP를 통해 또 다른 매력을 과시한다. 단 6곡이 수록된 이번 EP에는 트랙 수 이상으로 그만의 기교와 풍부한 사운드가 흘러넘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재즈라고 하면 타 장르에 비해 더 자유롭고 즉흥적이며 변곡점이 많다는 인상을 갖고 있는데, 그런 화려함 속에서 안정감을 놓치지 않는 매력을 그의 음악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앨범에서 유일하게 보컬이 얹어진 마지막 곡 <Truth>는 13분이나 되는 러닝타임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그의 모든 것을 담아냈으니 반드시 체크할 것.


14. Tinariwen - Elwan 

Tinariwen의 앨범은 그 퀄리티도 굉장하지만, 밴드의 출신과 장르를 고려했을 때 음악 외적인 부분으로 더 큰 질문을 던지는 앨범이다. 현대 대중 음악의 근간이 되는 블루스의 고장임에도 우리는 왜 그들의 음악에 좀 더 귀기울이지 못했는지, 그리고 그런 문화적 특성을 마치 하나의 토큰처럼 소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그 국가적 특성으로 인해 "월드 뮤직"이라는 장르로 통칭되는 것이 정말 옳을지, 이 산업에서 한 번쯤 생각해봐야하는 지점들을 모두 건드리게 된다. 이는 그만큼 좋은 앨범이라는 사실을 방증하기도 하지만, 영미권 이외의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음악을 소비하는 올바른 자세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때라는 경각심을 일깨우기도 한다. 


15. The War on Drugs - A Deeper Understanding

제목 그대로 The War on Drugs의 음악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돕는 앨범이다. 이들의 음악은 항상 어딘가를 향해 쭉 달려나가는 사운드로 가득차있는데, 이번 앨범에서도 그런 뚜렷한 향상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앞만 보고 달려나가기보다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듯한 향수가 묻어나기도 해서, 청자로 하여금 굉장히 다양한 심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바로 이들의 음악이 가진 포인트. 그런 면모가 정말 잘 드러나는 <Holding On>의 뮤직비디오와 함께 감상한다면, 이 밴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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